AI 도입은 직무를 없애기보다 경계를 흐린다
논문 『The impact of artificial intelligence on enterprise software user roles』를 읽고
SAP BTP 맥락의 인터뷰와 워크숍을 통해, AI가 기업 소프트웨어 사용자 역할을 어떻게 넓히고 겹치게 만드는지 읽은 작업 메모.
제일 먼저 든 생각
AI가 들어오면 어떤 직무가 사라질까, 라는 질문은 너무 빨리 결론으로 뛰어가는 질문일 수 있다. 이 논문을 읽으며 더 먼저 보인 것은 “직무 경계가 어디까지 흐려지는가”였다.
논문은 SAP Business Technology Platform(BTP)이라는 꽤 구체적인 기업 소프트웨어 환경에서 출발한다. 전문가 인터뷰 20명, 참여형 워크숍 24명을 통해 개발자, 아키텍트, 프로덕트 오너, 컨설턴트 같은 역할이 AI와 함께 어떻게 바뀐다고 느끼는지를 묻는다. 대규모 설문으로 보편 법칙을 주장하는 연구라기보다, 이미 AI를 업무에 가까이 둔 사람들이 자기 역할의 변화를 어떻게 예상하는지 관찰한 질적 연구에 가깝다.

기업 소프트웨어 안에서 AI는 ‘한 직무의 도구’라기보다 여러 역할 사이를 가로지르는 협업자와 통제 대상으로 등장한다.
역할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겹친다
초록에서 논문은 이렇게 정리한다.
“결과는 일상 과업과 개발 영역의 역할에 상당한 변화가 있음을 보여준다. 운영 과업의 자동화가 늘고, 인간-AI 협업이 확장되며, 에이전트형 AI 시스템에 대한 의존이 커진다.”
“The results reveal substantial shifts in day-to-day tasks and roles in the development domain, characterized by increasing automation of operational tasks, expanding human–AI collaboration, and growing reliance on agentic AI systems.”
내가 밑줄 친 부분은 “자동화”보다 “역할”이다. 워크숍 결과에서 연구진은 두 가지 흐름을 말한다. 하나는 역할의 확장과 중첩(role broadening and overlap), 다른 하나는 새로운 전문 역할의 등장이다. 개발자는 더 이상 코드 작성만 보지 않고, 컨설턴트는 솔루션 조사와 설계 제안까지 AI와 함께 다루며, 제품·아키텍처·보안·거버넌스 경계가 서로 닿기 시작한다.
이때 AI는 단순한 툴 목록이 아니다. 참여자들은 AI 에이전트를 “개발 관련 과업을 자율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사용자”처럼 인식했다고 한다. 조직 입장에서는 여기서 질문이 바뀐다. “누가 Copilot을 쓰는가”가 아니라 “AI도 사용자라면 권한, 로그, 검토, 책임은 어디에 붙는가”가 된다.
AI가 많이 하는 일과 사람이 더 봐야 하는 일
논문은 현재 AI가 주로 붙는 과업을 연구, 학습, 번역, 문서화, 코딩, 코드 분석, 테스트, 디버깅, 운영성 과업 등으로 묶는다. 대체로 반복적이고 비교적 구조화된 업무다. 반대로 AI가 들어올수록 더 두꺼워지는 사람의 일도 있다. 시스템 수준의 조율, 보안과 규제 준수, AI 산출물의 검토, 팀 간 책임 조정 같은 것들이다.
이 지점은 Deciflow식 업무설계에 꽤 직접적이다. AI 도입 계획을 세울 때 기능 목록만 만들면 빠지는 영역이 있다. 누가 프롬프트를 잘 쓰는지보다, 누가 AI가 한 일을 승인할 수 있는지, 누가 실패 로그를 해석하는지, 누가 에이전트의 권한을 줄이고 늘리는지가 더 중요해질 수 있다.

이 논문은 SAP BTP 사례를 통해 개발·컨설팅·제품 역할의 경계 변화를 관찰한다. 특정 플랫폼 맥락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기업 소프트웨어 도입 질문에는 바로 연결된다.
조직 AI 도입표에 새로 넣을 칸
이 논문을 읽고 업무에 붙인다면, AI 도입 현황표에 “사용 도구” 칸만 두지 않을 것 같다. 최소한 세 칸을 더 넣고 싶다.
- 역할 경계 변화: 이 과업을 AI가 도우면 어느 직무의 일이 다른 직무로 넘어가는가.
- 감독과 승인 지점: AI가 만든 결과를 누가 언제 멈출 수 있는가.
- 새 역할 후보: AI 거버넌스, 오케스트레이션, 데이터·보안 검토처럼 기존 직무명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는가.
논문이 보여주는 것은 “AI가 개발자를 대체한다”가 아니다. 적어도 이 조건에서는, AI가 기업 소프트웨어 안에서 직무 사이의 경계선을 다시 그리게 만든다는 점에 가깝다. 그래서 오늘의 작은 실험은 이것이다. 우리 팀의 반복 업무 하나를 고르고, 자동화 가능성보다 먼저 그 일이 자동화되면 책임선이 어디로 이동하는지를 한 장으로 그려보기.